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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s의 설교. Q.T.

마태복음 5장 33~48절 “ 원수를 사랑하라뇨.. ”

by phos 2022.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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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33~48절 “ 원수를 사랑하라뇨.. ”

1. 오늘 묵상 말씀

마태복음 5:33~48

33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 임이요

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 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1. 내용 요약과 묵상

예수님은 맹세에 대한 태도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 원수들의 실재

분노와 증오가 쌓이면 원수가 되고 더 나아가 복수를 하게 됩니다. 증오와 분노가 복수로 폭발하여 무차별적인 살상을 저지르는 일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지역과 당파가, 국제적으로는 국가와 민족이 생각과 이해가 다르다고 서로 미워하고 복수하려 나서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하실 당시와 1세기 초 기독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의 현실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기독인들을 이방인 또는 이단자로 여겨 박해했습니다. 로마인들의 눈에는 예수 신앙인들이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이고 황제 숭배에 불참하는 이단자들이며 나무 위에 달려 처형당한 범죄자를 구원자로 믿는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해하려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기독인들에 대한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는 30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로마는 외국 종교에 대체로 관용적이었으나 유독 기독인들을 가혹하게 박해했습니다.

기독인들에 대한 첫 박해는 유대인들이 주도했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증오한 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집사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으며 사도 야고보를 처형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여러 번 감금하고 고통을 주었고 바울을 거칠게 다루었습니다. 예수의 친동생 야고보를 살해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목회자 시므온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의 화형을 사주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적개심을 가지고 예수와 예수 신앙인들에 대한 지독한 험담을 유포했습니다.

방화범으로 몰려 화형을 당하는 크리스찬/사진 출-바울영화 스샷



주후 64년경, 황제 네로는 로마의 대화재의 방화 죄목을 기독인들에게 뒤집어씌우고 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는 기독인들을 용의주도하며 잔인하게 죽였고 십자가에 못 박거나 화형에 처했습니다. 사나운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 씌워 개들에게 찢겨 죽도록 했고 십자가에 매달아 불태웠습니다.

원형경기장에서 열린 경축일 행사의 오락물로 삼았습니다. 당시 황제와 원로원은 국민들의 애국심을 과시하려고 대중오락을 지원했는데 무사, 권투사, 레슬링 선수들, 검객들을 고용하여 죄인들을 고문하는 광경을 보여주었습니다.

로마인들의 증오심을 한쪽으로 몰아 애국심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원형경기장에서 공개적으로 처형하여 사회통제 비용을 줄였는데 로마제국의 기독인들에 대한 박해는 4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제2차 박해는 주후 95년 경 황제 도미티아누스 통치 때 시작되었습니다. 황제는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보내고 있는 헌금을 자신에게 바치라고 강요한 적이 있는데 엄격한 법률을 만들고 반항하는 유대인들을 처벌했습니다. 유대교적 풍습과 비슷한 형태를 가진 기독인들도 동일하게 박해했습니다.

기독인들에 대한 로마 사회의 적대감이 점차 증가되었고 로마인들은 예수 신앙인들을 민중의 적으로 취급했습니다. 공회당, 시장, 목욕탕 등 공공장소 출입을 금지했고 폭도들은 길거리에서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졌습니다. 로마는 기독인들을 체포하여 악형 처벌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집단 처형의 날을 기다리는 기독인들을 잔인하게 고문했습니다. 벌겋게 달군 철판 위에 앉혀놓고 인두로 살을 지졌으며 곤봉으로 때려죽였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황소 우리에 던져버렸습니다. 거기서 죽음을 기다리게 했고 죽은 시체들을 신들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기독교가 로마의 극심한 박해와 그 많은 우상 종교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점차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누구이기에 기독인들은 자기의 목숨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로마제국 시민들이 갈릴리 촌사람들의 이야기에 사로잡히는 까닭은 겉으로는 예수 신앙 운동 가담자들을 비웃고 가까이하지 않았지만 기독인들의 삶의 고결성, 진실성, 대담성에 내심 감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 진리를 듣고 예수를 구원자로 믿었고 끝이 없는 참극의 행렬에 가담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신앙인들과의 큰 차이점으로 크리스천들의 수준 높은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들 수 있었습니다.

칼과 십자가, 정치 권력과 예수 신앙 공동체, 황제와 ‘나무 위에 달려 죽은 구원자’의 대결은 생사를 건 싸움이었으면서도 처음부터 불공평했습니다. 칼을 가진 정치 세력과 믿음만을 가진 기독교의 대결은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공존도 타협도 허락되지 않았고 관용과 포용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굴복해야 했는데 치열한 전투에서 놀랍게도 칼이 아니라 십자가가 승리했습니다. 권력이 아니라 믿음이 승전했습니다.

목숨을 건 전쟁에서 영원한 주에게 충성을 바쳤고 오히려 더 공고히 결속했습니다. 죽음으로써 진리의 참됨을 증언했습니다. 박해가 지속될수록 신도 수가 증가했고 첫 3세기 동안 흘린 기독인들의 피 흘림은 기독교가 로마에 정착하는데 큰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예수의 사도들이 가르친 십자가 구원의 복음과 진리는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사로잡았으며 삶을 변화시키고 내세의 소망을 갖게 했습니다.

기독인들은 세상사보다 영적인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형제애로 자주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러자 온갖 가증스런 헛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예배와 애찬 모임과 관련하여 그들이 근친성애자들이며 식인 인간들이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재난의 발생은 로마의 신들이 진노로 내린 징벌이며 예수 신앙인들 탓이라는 헛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우상숭배 활동에서 돈을 벌던 사제들과 마술사들은 정치인들과 상인들과 결탁하여 군중을 선동하고 기독인들을 험담했습니다.  자기들의 사업에 손해를 끼친 새 종교를 비난하고 공격했습니다.

나무에 달려 처형된 죄수를 구원자로 믿고 신처럼 찬양하고 예배하지만 절도와 간음과 부도덕한 죄를 범하지 않으며 이웃을 사랑하며 공동식사를 하려고 모이는 특징을 확인하면서도 말입니다.

주후 161년 황제로 등극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에서 제 4차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이상적인 황제라고 칭송을 받는 새 황제는 미신을 신봉하고 점성가들을 찾아다녔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는 기독인들을 증오했으며 계속되는 침략과 재해들은 로마의 신들이 기독인들 때문에 분노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전통 종교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박해는 177년에 극에 달했고 스토아주의 철학을 배운 황제는 기독인들을 불건전한 자기 선전가들이라 비난하고 멸시했습니다.

2) 원수를 용서하기 어려운 이유

사람은 서로 실수하거나 상처주기 마련이기에 용서를 통해 갈등과 원한을 해소하며 살지 않으면 사람 사이는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원한에는 경중이 있고 고통에는 임계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서는 고통도 적지 않게 존재합니다. 이런 감정 대부분은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는데 고통은 자신의 경험만큼 알 수 있는 것이고, 타인의 고통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밀양의 한 장면(사진 출-썰전 유투브 장면 스샷)



영화 밀양은 당사자의 원한과 고통은 오롯이 그의 것임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아도 이미 용서를 받았대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용서를 해요?”

신애의 어린 아들이 유괴범에게 살해되었고 교회는 수감된 범인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그녀를 다독입니다. 옳은 말이고 힘이 되는 말이기에 신애는 범인을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순간 마음이 아주 홀가분해집니다. 신앙의 힘이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범인은 이미 용서받았다고 하며 주님에게, 죄로부터 해방된 얼굴에 경건하고 평온한 기운까지 감도는데 그 모습을 본 신애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집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동일한 입장이 되어 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애의 분노와 슬픔을 공감하던 관객은 영화를 보고 난 후 자신의 문제와 씨름해야 할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고통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자식을 죽인 원수를 사랑하라니… 버거운 요청입니다.

성경에 보면 ‘원수’는 사랑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가장 놀라워하는 구절입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도 사랑하기 어려운데 ‘원수’를 사랑하라뇨..

성경에 보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절도 있는데 ‘원수’도 내 이웃 중의 하나인가? ‘원수’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가? 라는 생각이 들면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사랑”을 뜻하는 용어 셋이 있는데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입니다. 에로스는 상대의 매력에 끌리는 감정입니다. 행복한 결혼이 에로스 사랑의 모형입니다. 에로스는 미모, 장점, 재능 따위가 불러일으키는 사랑입니다. 필리아는 상호간 흥미와 관심 때문에 끌리는 마음입니다. 필리아는 친구 간의 우정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아가페는 조건 없이 상대의 필요를 돌보는 사랑입니다. 성경이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할 때 아가페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아가페 사랑을 정확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니 죽어도 못해!” 합니다. 옳습니다. 에로스나 필리아의 사랑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아가페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좋아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경고하셨습니다. 영어로는 심판의 위험이 있다고 표현했습니다(in danger of the judgement).

영어로 Anger는 분노라는 뜻입니다. 이 말 앞에 D자를 붙이면 Danger, 곧 위험이 됩니다. 그러니까 “노하면 위험해진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쌓인 원한은 행복을 빼앗는 강도이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세계에 맞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테러와 암살, 봉기 등 분노를 동력으로 삼아 대항하는 방식이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네 왼편도" 내밀라는 사랑으로 감싸는 방식이 있습니다(마태복음 5:39).

열심당(Zealot)/사진 출-김영근블로그



1세기 초반에는 열심당(熱心黨, Zealot) 당원 몇 명이 후자의 방식을 취한 예수의 제자로 들어갔습니다. 문자 그대로 뜨거운 열정과 열심히라는 히브리어에서 온 말로 일부는 시카리(sicari)라고 불렀는데 '단검을 가진 자객'이라는 의미를 지닌 비밀 당파였습니다.

열심당은 BC 6년 가말라 사람 유다가 도마의 호적 명령에 반대하여 일으킨 애국운동 당파이며 신앙적인 경향보다는 구국적 성향이 강하여 마사다 전투에서 몰사할 때까지 각종 유혈 운동을 벌였습니다.

바리새파와 엣세네파와 유사한 신학노선을 취했고 유대인 선민사상이 투철했습니다. 이들은 로마로부터의 정치적인 독립이 주목표였으며 예수를 통하여 민족 해방의 꿈을 성취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서양 문학에서 소재로 활용되었고, 한국 문학에서는 김동리의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가 여기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또 기원전 1700년쯤에 생긴 함무라비 법전이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받은 대로 갚는 법인데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 왕이 선포한 법전으로 예수님 태어나기 1700년 전에 생겨난 법입니다. 이 법이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서아시아 일대, 근동 지역에서 통용됐습니다. 당시의 상식적으로 통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믿던 사람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니 정말 황당했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힘든데, 나를 괴롭히는 놈들을 위해 기도까지 하라니..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될 수 있다니... 다시 말해 그래야만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율법만 지키면 천국에 간다고 믿던 유대인에게 이건 그야말로 파격적인 선언입니다.

3)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죠? 미워하기만 해도 성에 차지 않는데, 왜 내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죠? 사람마다 원수 하나씩은 다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자 잠시 눈을 감고 그 원수를 떠올려보세요. 그럼 어떻습니까? 생각만 해도 화가 나고 기분이 불쾌해지죠. 생각을 많이 할수록 더 많이 화가 나죠. 마음속에서 원수를 향해 화살을 막 쏘아대고 있는 기분이 들 겁니다.

맞아요. 원수를 미워할 때 우리는 화살을 쏘아요. 원수를 향해 화살을 쏘고 독기를 뿜어요. 그 화살과 그 독기가 날아가서 원수의 가슴에 꽂히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원수를 떠올리면 저절로 독기가 올라오잖아요. 내 마음에서 독기가 올라와요. 그럼 그 독기가 가장 먼저 어디를 적실까요? 내 마음인가요? 원수의 마음인가요? 그 독기는 내 마음을 먼저 적십니다.

그러니까 그 독기의 1차 희생자는 원수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는 겁니다. 나를 먼저 적신 뒤에 독기가 원수를 향해서 날아가죠. 그런데 그 독기가 원수에게 닿을 때보다, 닿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생각으로 미워하는 거니까. 그런데 독기가 원수를 때리지 못할 때도, 나 자신은 때리게 돼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만든 독기와 내가 만든 화살이 나를 먼저 때리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과 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겁니다. 천국에 간다는 건 하늘나라의 속성과 내 마음의 속성이 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날 알렉산드리아에 한 신실한 성도가 살았습니다. 불량배들이 그의 신앙을 비웃었습니다. “네가 믿는 그리스도가 무슨 기적을 보여 줄 수 있느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당신들이 내게 퍼붓는 모욕과 포악을 내가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참고 견디는 기적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원한의 감정을 제거할 줄 아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전쟁은 나라간에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고 단정한 결과입니다. 법정 소송은 개인이나 집단 간 상충된 이해관계의 결과입니다. 개인의 불행은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살기를 거절한 결과입니다.

내 마음에 흉터가 있고 독기가 있어서 원수를 떠올릴 때마다 화살이 ‘타닥타닥’ 꽂히고 독기에 쩔어있으면 예수님의 마음과 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통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형법에 보면,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하는 모세의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사실 복수를 하라는 법이 아니라, 근본목적은 복수를 금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법입니다. 복수는 복수를 불러일으키고, 따라서 복수한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두 가정이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한쪽 가정에서 다른 가정의 누구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죽임을 당한 자녀나 가족이 가만히 있습니까? 보복을 하기 위해서 또 사람을 죽입니다. 계속해서 죽이고 죽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의 끝없는 전쟁도 서로 보복하고 보복하는 복수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복수극을 어떻게 끝낼 수 있습니까? 끝을 내는 방법은 사랑하고 용서해 주는 것,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상대방이 끝을 내기 전에 내가 먼저 끝을 내야 합니다. 내가 끝을 내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본문에 구체적인 예가 있습니다. 39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특징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내 버려두면 지쳐서 그만두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복수해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신원해주십니다.

혈기 쓰는 자에 대해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고 하셨습니다. 이 교훈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오른편 뺨을 칠 때에 왼편 뺨을 돌려대는 것입니다.

원문에 보면 이 구절은 한편 뺨을 때릴 때 그냥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은 괜찮은데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가장 큰 모독이 됩니다.

손등으로 때리면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보다 덜 아픈데, 이스라엘에서는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최고의 모독이라 생각합니다. 본문 말씀의 가장 중요한 점은 상대방에게 보복을 하지 말아라, 상대방에게 성내지 말아라 하는 뜻입니다.

송사하는 자에 대해서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상대방의 옷을 가지려는 사람이 속옷을 가지려 하거든 법적인 논쟁을 하지 말고 겉옷까지 주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당시의 겉옷은 이불 대용으로 사용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송사하는 자들에 대해서 내가 100% 이기려고 하는 자세를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내가 포로를 당했을 때는 본문 41절에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의 로마법에는 ‘정복민이나 포로들에게 시중을 들게 할 때 임금을 주는 것이 없이 1마일까지는 시중을 들게 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예가 바로 구레네 시몬의 예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 때에 너무너무 무겁고 지쳐서 감당 못합니다.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그러니까 로마 병정이 지나가던 구레네 시몬을 불렀습니다. ‘당신이 대신 지고 가시오’ 1마일까지는 그것을 지고 가게 할 권한이 법적으로 있었습니다. 그 이상은 안됩니다.

그런데 본문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혹시 로마 사람들이 당시의 법을 빌려서 너로 하여금 억지로 1마일 시중을 들게 하도록 명령을 한다면, 억지로 1마일만 가지 말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해주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할 때 ‘내가 한달에 50만 원을 받는다. 그러니까 나는 50만 원만큼만 일해야지’라고 손익적인 계산을 하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실제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훨씬 더 많습니다.


4)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방법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그분의 능력이 임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용서도 능력이고 사랑도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아니라 관용의 법, 사랑의 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사회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4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이 간단한 교훈을 생활에 적용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어렵고, 아니 어떤 면에서 보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본문 43절 이하에 보면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법은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이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 집 부근에 사는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이웃은 유대인들, 즉 동족을 이웃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이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지리적 조건은 관계없습니다. 멀리 있어도 유대인이면 이웃이고, 또 아무리 바로 옆집에 살고 있더라도 그들이 이방인일 경우는 원수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웃을 굉장히 사랑합니다. 보통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지금도 굉장히 미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시면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말씀과 함께 솔직히 이 말씀도 읽을 때마다 마음에 자책감을 많이 갖게 됩니다.

스탠리 존스는 인생에 선을 악으로 갚는 마귀의 수준, 선을 선으로 갚는 율법의 수준. 악을 선으로 갚는 그리스도의 수준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오직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면했습니다.

스탠리 존스는 “싫어하는 사람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를 위해 기도의 입김을 불어내라. 기도는 미움과 원한의 감정을 물리치는 방어막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려고 애는 쓰는데 처음부터는 아니고 얼마큼 기도를 해야 겨우 그들이 불쌍해 보이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는 원한을 제거하는 수단입니다. 진심으로 기도하면서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신원해 주십시요. 내가 너무 억울합니다. 이 문제 해결해 주십시오’ 이렇게 한참 기도하다 보면 제 기도가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되고 기도가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 그 영혼이 너무 불쌍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알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용서해 주시고 그도 예수님을 믿게 해 주세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해 주세요’ 하면서 간절하게 기도가 나옵니다.

처음부터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이 잘 안 되지만 계속해서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고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도 주실 줄 믿습니다.

원수의 머리 우의 숯불/그림 출-walking with the Bible



원수에 대한 말씀은 잠언 25장 21-22절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그에게 빵을 주어 먹게 하고 그가 목마르거든 그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네가 그의 머리 위에 불타는 숯을 쌓으면 주께서 네게 보답해 주시리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며 원수의 머리 위에 불타는 숯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원수의 머리 위에 불타는 숯을 쌓을 수 있을까요?

로마서 12장 20절에 그러므로 네 원수가 주리거든 그를 먹이고 그가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 그리함으로 네가 그의 머리 위에 불타는 숯을 쌓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그에 대한 최대의 보복이며 친히 원수 갚지 말고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해석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원수에게 선을 베풀수록 하나님이 그의 머리 위에 진노의 숯불을 하나씩 쌓으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핀 숯은 성령의 불을 의미하며 핀 숯과 접촉하는 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이사야 6장 6-7절에서 스랍이 핀 숯을 이사야의 입술에 대어 불법을 제거한 것처럼 원수에게 선을 베풀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원수가 회개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핀 숯을 머리 위에 올리면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이처럼 원수에게 선을 행하면 원수가 스스로 낯이 뜨거워져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기 죄를 깨닫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수에게 선을 베풀면 그 선행으로 원수가 스스로 회개하게 되거나 하나님이 그에게 심판의 불로 앙갚음을 해주신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만약 원수의 머리 위에 심판의 불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악랄한 복수심을 품고 그에게 선행을 베푼다면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상 받을 행동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죄인이 죄 가운데서 죽지 않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원수에게 처절한 보복을 하기 위해서 선을 베풀거나 원수의 머리 위에 불타는 숯을 올려놓아 그에게 화상을 입힌 다음에 하나님께 상 받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의 숯불을 쌓는다는 표현은 사람의 맨 머리 위에 숯불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머리 위에 이고 온 숯불을 차곡차곡 담아주는 것입니다. 원수가 자기 머리 위에 뜨거운 숯불을 다 쌓아놓을 때까지 잠잠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정말로 숯불이 필요해서 머리 위에 화로를 이고 왔을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리가 끝난 다음에도 화덕의 불을 완전히 끄지 않고 약한 불씨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잿더미 속에 남겨둔 불씨를 이용하여 불을 일으켜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화덕관리를 제대로 못하거나 게을러서 불씨를 꺼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머리 위에 화덕을 이고서 다른 집에 찾아가서 불을 좀 나눠달라고 구걸을 해야 했습니다. 자기 집 화덕의 불을 꺼뜨리고 그것을 얻으러 다니는 것은 동네 사람들 보기에도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었습니다.

나의 원수는 어려운 일이 생겨도 선뜻 나에게 손을 내밀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얼마나 답답한 상황이면 가장 껄끄러운 나에게 숯불을 얻으러 오겠습니까. 그 때야 말로 평소 원수에게 쌓인 분풀이를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아도 가만히 내버려 주어도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황에서 원수를 매정하게 대하지 말고 그가 머리에 이고 온 화로에 숯불을 쌓아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원수에게 먹을 것, 마실 것을 나누어 주는 것과 같은 선행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선행에 보상을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원수에게 복수하지 말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어 줌으로 머리 위에 숯불을 쌓아주는 것과 같은 친절을 베풀라 권면하십니다. 그래야 선으로 악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48절은 본문의 모든 말씀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라는 말은 ‘흠이 없다’는 말입니다. 뭐가 흠이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 인격에 흠이 없다는 얘기입니까?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 그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해를 비취실 때에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시고, 비를 주실 때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다 같이 내려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공평하게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온전해야 합니다. 구별하면 안됩니다. 더군다나 지방색,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닙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 원수가 되는 사람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그들을 사랑해 주라는 말입니다. 구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온전해지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자연인 그대로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성품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듭나야 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비로소 나 자신을 이기고, 내 혈기를 이기고, 내 육신의 생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늘 기도에 힘쓰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 모두가 다 온전해지는 귀한 역사가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기도

보복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 자신이 복수하지 않게 하옵시고,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게 해주옵소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저희도 온전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 제목

하나님의 자녀답게 수준있는 삶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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